절대권력(絶對權力) 돈주앙 - 뮤지컬 돈주앙 리뷰

 

나는 가끔 ‘사람들은 왜 사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침 햇살과 상관없이 정해진 시간이 되면 부리나케 일어나서 어딘가로 달려가고, 특히 한국에서 집 평수 넓히려고 평생 아등바등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인간의 삶이 이리도 구차한가라는 회의가 생긴다. 그렇다고 많은 이가 갈망하는 성공의 개선문 통과 확률도 점점 낮아지고 있는데 무엇이 그리 삶에 매달리게 만들까. 

인생이 무상해지는 것 같으면 톨스토이가 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으라고 추천하는 사람도 있더라. 난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았는데 서평을 보니 해법은 ‘사랑’ 이라는 단어로 뭉쳐지는 것 같다. 너무 뻔한 소리라고? 그럴지도. 하지만 톨스토이 이전에도 무수히 많은 현자들이 사랑의 소중함과 경이로움을 합창했지만 인류가 이를 진실로 베풀거나 느낀 적이 있을까. 인간 역사에서 전쟁과 폭력이 넘실거린 건 그만큼 사랑이 절실한 아이템이라는 반증이겠지.

사랑에는 다양한 가지수가 있다. 신을 향한 사랑,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 남녀 사이의 사랑, 동성애, 생명에 대한 사랑 등 애정을 갖는 대상만큼 종류는 거의 무한대. 이 가운데 공통분모가 가장 넓은 사랑은 남녀의 사랑일 것이다. 우리는 이성을 보는 눈이 뜨이면서 사랑을 얻으려는 투쟁(?)을 시작한다. 사랑의 성공은 감미롭고 실패는 쓰디쓰지만 사랑만큼 인간을 달콤하고 매혹적으로 사로잡는 것이 있을까. 누군가 ‘실패한 사랑은 쓰라린 추억을 남기고 성공한 사랑은 남루한 일상을 남긴다’ 고 했지. 그래도 인간은 사랑의 찬란한 순간을 위해 폭주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뮤지컬 돈주앙은 경쾌하다. 스토리의 흐름이 빠르며 관능적인 플라멩코춤이 관객의 호흡을 빨아들인다. 배우들의 노래 솜씨도 수준급이라 눈과 청각을 자극하며 희열을 향해 가파르게 때로는 숨고르기를 하며 정상으로 끌어올린다. 그러나 뮤지컬에서 돈주앙의 작업노하우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것이다. 뮤지컬 돈주앙은 숫컷들의 기대와는 달리 돈주앙의 고뇌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아니 돈주앙 같은 호색한한테도 고뇌가 있다니 누굴 약 올리려는 건가?

돈주앙은 요즘 말로 넘사벽이다. 숫컷들의 절대로망이라고 해두자. 모든 숫컷들은 여자들의 사랑을 얻으려 하지만 성공확률은 높지 않다. 설령 사랑을 얻었어도 헤어질 수 있고 미움과 상처를 남기게 된다. 그런데 돈주앙은 수많은 여성들과 스캔들을 생산했어도 누구 하나 그를 원망했던 여자가 없다고 한다. 이게 바로 수컷들이 꿈꾸고 부러워하는 필살기이리라. 도대체 비결이 뭘까. 여자들도 돈주앙이 희대의 바람둥이인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한 이유는?

나는 뮤지컬 돈주앙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관람할 때 유쾌하고 스트레스 풀어줄 정도의 공연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돈주앙을 소재로 삼은 대작 뮤지컬이 심각한 애정물 버전일리 없고 설령 돈주앙의 노하우가 노출된다고 한들 아무나 차용한다고 효력이 통하지는 않을 테니까. 더구나 스페인에서 온 플라멩코팀, 특히 마리아 로페즈의 관능적인 분위기와 춤에 홀려 뮤지컬의 매력에 푹 빠졌다. 영화 같은 1막의 빠른 전개에 지루할 간격이 없었고 돈주앙의 여성편력과 이로 빚어지는 갈등과 대립구도를 가뿐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스토리가 깊어질수록 돈주앙의 고민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가문 좋고 돈 많고 잘생기고 말발 뛰어난 돈주앙한테 무슨 고민이 있을까. 남들이 보기엔 행복해도 속 모르는 고민이 있을 거라는 얄미운 투정으로밖엔 이해되지 않았다. 평민들은 하루에 얼마를 지출할지 골치 아픈 셈을 하고 직장과 가정의 충실한 의무를 지키려 혹사당하는데 고작(?) ‘이 죽일 놈의 인기가 문제야’ 라는 문제의식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잘 나가는 한량의 넋두리를 치명적인 유혹으로 느낄 만큼 너그럽지 못했다. 그래서 계급적인(?) 색안경으로 돈주앙을 불편하게 보고 있었는데 그가 추구하는 사랑과 한 사람에게 얽매이지 않으려는 태도에 오한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극 중에서 돈주앙과 그의 친구 돈 카를로가 반복적으로 언급한 ‘자유’ 라는 대사 때문이었다.

돈주앙은 자유를 원하고 구속받는 삶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자들은 돈주앙이 결국 자신을 버릴 것이라는 것을 안다. 후회하면서도 하게 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는데 왜 우리는 결말을 알면서도 감행하는 것일까. 그리고 자신을 떠나가도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고 비통해하는 것은 여자의 숙명으로 봐야 할까. 그게 아니었다! 나는 깜빡 속았다.

나는 처음에 돈주앙을 스페인의 매력적인 플레이보이 이야기로 봤는데 이는 겉모습에 불과하다. 돈주앙은 인간의 권력의지와 이를 추종하는 대중들의 몰개성을 직시한 작품이었다. 권력은 사랑이라는 감정과 상통하는, 사랑과 대척점에 있으면서 절묘하게 겹쳐있다. 정치가와 플레이보이는 인간의 권력의지를 형태만 다르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정치가는 권력을 얻기 위해 대중들에게 끊임없이 구애한다. 그리고 사랑(표)을 얻고 유효기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훌훌 지나간다. 공약은 공약일 뿐이고 그들의 말과 행동은 상황에 따라 돌변한다. 대중들은 자신을 저버린 정치가를 미워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번에는 좀 다르겠지 하며 또다시 선택을 한다. 버림받을 줄 알면서도 돈주앙을 쫓는 여인들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한국 사회에서 많이 보는 풍경 아닌가. 우리는 그간 우리가 스스로 뽑은 지도자들을 얼마나 저주했나. 온갖 희망과 열광으로 세례 받은 지도자들이 유통기한 지나기도 전에 불량품으로 전락했다.

나는 2막에서 돈주앙이 결투를 통해 죽음을 선택한 장면이 몹시 쓰라렸다. 그간의 악행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속죄하는 의미였지만 난 그 장면에 가슴이 후덜거렸다. 항상 자유를 꿈꿨다는 돈주앙은 바로 절대권력의 모습이 아닌가! 절대권력은 책임을 지지 않기에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될 수 있다. 구속받지 않는 사랑이 책임지지 않는 절대권력과 무엇이 다른가. 돈주앙이 죽기 직전 고민하는 장면에서 나온 공중의 칼은 ‘다모클레스의 검(the sword of Damocles)’을 상징한 것으로, 그가 절대권력의 아슬아슬한 정점에 있음을 나타낸다.

그렇다. 절대권력으로 남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이다. 죽게 되면 책임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역사의 심판이 있다고? 난 그것을 신뢰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죽은 박정희를 그리워하고 그 시대가 나았다고 칭송한다. 그렇다면 지금 증오하는 정치가들이 죽고 나면 언젠가 그들을 그리워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나는 돈주앙을 보면서 사랑이라는 숭고해 보이는 감정이 절대권력과 맞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관객들이 돈주앙의 피날레에 기립박수를 치며 커튼콜의 환호성이 울려 퍼질 때 불길한 생각이 퍼져갔다. 돈주앙의 사랑과 최후에 감동받았다면 권력자에 대한 맹종도 그만큼 쉬워지지 않을까. 돈주앙의 판타지에 끌리듯이 우리를 나긋하게 해줄 것 같은 권력자에게 넘어가지 않을까. 이미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이건 시대를 초월한 대중의 운명인가. 아니면 공연과 현실은 다를 뿐이라며 위안을 삼아야 되나. 돈주앙.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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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oudplanet | 2009/02/12 21:00 | Cloud + Musical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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